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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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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준 사진작가/ 물성의 전이 상세 내용

한희준 사진작가/ 물성의 전이
물질의 시간을 새기다
한희준 ‘물성의 전이’, 그 깊은 사유

수년 전, 청주 공예관에서 故 박태준 회장의 초상을 마주한 기억이 선명하다. 사진을 기반으로 한 이미지였지만, 표면은 마치 오랜 세월 비바람을 맞은 듯 붉은 녹이 슬어 있었다. 산화철(酸化鐵) 기법으로 완성된 그 작품은 한 인물의 시간을 넘어, 물질이 변화하고 소멸해가는 장구한 서사를 담고 있었다.

2025년 9월 24일, 네오아트센터에서는 4인 초대전 ‘실재와 가상 사이’가 개막한다. 이 전시에서 한희준 작가는 '물성의 전이(Transference of Physicality)' 연작을 선보일 예정이다. 이번에 그가 마주한 물질은 쇠가 아닌, 우리 시대의 가장 문제적이고도 일상적인 물질, 플라스틱이다.

작가의 철학적 탐구는 지극히 사적인 경험에서 출발한다. 그는 “해외 전시에서 우연히 물을 마시다가 문득 ‘이 물은 어디서 오는 걸까’라는 의문이 들었다”고 회고한다. "알프스산, 북극해 같은 청정지역에서 나오는 물을 우리는 제일 골치 아픈 플라스틱 병에 담아 마시고 있는 모순.” 이 근원적인 아이러니에 대한 ‘가슴 아픈 생각’이 그의 작업 전체를 관통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플라스틱의 위험성을 고발하는 환경 캠페인과 궤를 달리한다. 그는 계몽적 구호를 외치는 대신, 플라스틱이 열에 의해 녹아내리고 그 본질이 변하는 ‘물성의 전이’ 순간 자체에 깊이 침잠한다. 단단했던 고체가 형태를 잃고 흘러내리는 그 모습은, 우리가 견고하다고 믿었던 문명의 기반이 얼마나 유동적이고 불확실한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은유다. 그의 작품 앞에서 우리는 플라스틱이라는 특정 소재를 넘어, 인공과 자연의 경계가 무너진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성찰하게 된다.

흔히 현대미술을 감상할 때, 난해한 기법에 대한 설명에 매몰되어 그 본질을 놓치는 우를 범하곤 한다. 한희준 작가의 작업 과정을 아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그는 렌즈를 통해 현실을 재현하는 전통적 사진의 방식을 거부한다. 대신 19세기 사진술인 검 프린트(Gum Print)나 시아노타입(Cyanotype) 같은 고전 기법을 선택한다. 디지털이라면 단 몇 분 만에 완성될 이미지를, 그는 수일, 수주에 걸쳐 수십 번의 레이어를 쌓아 올리는 고된 노동으로 완성한다.

이것은 단순히 기술적 선택이나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작가와 작품 사이에 오랜 시간을 거치며 깊은 ‘이야기’를 쌓아 올리는 과정이다. 그의 암실은 제의적(祭儀的) 공간이며, 그의 노동은 ‘수행(修行)’에 가깝다. 반복적으로 감광유제를 바르고, 빛을 쬐고, 씻어내는 과정은 죽었으나 썩지 못하는 물질의 영혼을 위로하는 긴 기도의 시간이 된다. 작품에 쌓이는 물리적인 층위는 플라스틱이 지구에 남긴 상처의 시간을, 작가가 그 물질의 고통과 함께한 시간의 기록이다. 이처럼 기법은 철학을 담아내는 그릇이며, 그의 작품에서 과정은 곧 내용 그 자체가 된다.

한희준의 작품 세계는 ‘인류세(Anthropocene)’와 ‘탈사진(Post-Photography)’이라는 동시대 미술의 핵심적인 담론과 정확히 맞닿아있다. 그의 추상 이미지는 인류가 지구 환경을 극적으로 변화시킨 시대의 풍경화이며, 우주 성운처럼 보이기도, 분열하는 세포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 모습은 플라스틱이 자연과 뒤섞여 만들어낸 새로운 생태계 ‘플라스티스피어(Plastisphere)’의 초상이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이 풍경을 끔찍하게만 묘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의 작품은 기이하고도 매혹적인 이미지를 품고 있다. 이 역설적인 이미지는 그의 작품이 관객의 해석을 한정하는 ‘선언’이 아닌, 무한한 사유를 이끌어내는 ‘질문’이 되게 하는 힘이다. 관객은 편리함이라는 유혹과 환경 파괴라는 재앙이 공존하는 현실처럼, 작품의 아름다움과 그 근원의 비극성 사이에서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

결국 한희준은 사진의 원리인 빛과 시간, 그리고 화학 반응을 이용해 우리 시대의 가장 어두운 단면을 가장 숭고한 방식으로 탐색하는 작가다. 그는 답을 주는 대신, 우리가 만들어낸 재앙의 풍경 속에서 발견되는 기이한 이미지를 통해, 우리 스스로 삶과 문명을 성찰하게 만드는 거대한 철학적 공간을 열어 보인다.

작가 노트의 마지막 구절은 그의 예술이 도달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지점을 보여준다. “나는 그들이 새로운 존재로 우리의 품에 안기는 날을 기대하며 '플라스틱' 작업을 하고 있다.” 그의 예술은 비판을 넘어선 애도이자, 긍정적 전환을 향한 간절한 기도다. 이번 전시는 그 깊은 사유의 공간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 네오아트센터 박정식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