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 입술이 건네는 위로
노재순, 입술로 쓴 인생의 의태어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다. 예부터 입술은 인간의 의사가 소통되는 통로이자, 마음의 문으로 여겨졌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인생의 힘든 고비마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결의를 다지고, 골이 잔뜩 난 어린아이의 삐죽 나온 입술에서 그 어떤 말보다 선명한 감정을 읽어내기도 한다. 이렇듯 입술은 인간이 가진 가장 정직하고도 민감한 ‘감정의 의태어’다.
2월 하순, 봄을 시샘하는 눈발이 들녘을 하얗게 덮던 날, 노재순 작가의 작업실을 찾았다. 화실 문을 열자마자 마주한 것은 캔버스를 가득 채운 거대한 선홍빛 입술들이었다. 무채색의 거친 배경을 뚫고 터져 나오는 그 강렬한 색채는, 차가운 눈길을 뚫고 온 방문객의 시각을 단숨에 압도했다.
노재순은 지난 10여 년간 ‘입술’이라는 단일 소재에 천착해온 우리 시대의 화가다. 21대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을 역임하며 한국 미술계의 행정적 기틀을 다졌던 그가, 작가로서 도달한 예술적 종착지는 역설적이게도 가장 본능적인 신체 부위인 ‘입술’이었다.
작업실 한편에 놓인 빛바랜 흑백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국민학교 시절, 소년 조선일보 주관 사생대회에서 입상하며 수줍게 웃고 있는 소년 노재순의 모습이다. 그 소년의 진지한 눈빛은 60년의 세월을 건너 지금 거대한 캔버스 앞에 선 거장의 화력으로 치환되었다. 1990년대 후반 ‘Relation(관계)’ 시리즈에서 보여준 인간 존재에 대한 원초적 고뇌는, 이제 입술이라는 고도로 응축된 상징을 통해 세상을 향한 명징한 메시지로 거듭났다.
나는 그의 작품 배경에서 묘한 향수를 느꼈다. 그것은 마치 70년대 연애편지 속에 몰래 찍어 보냈던, 지금은 빛바랜 키스마크가 담긴 종이 한 장을 우연히 발견한 듯한 느낌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잊힌 첫사랑의 흔적일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삶의 치열한 고비마다 삼켰던 무언의 외침일 그 자국들이 작가의 시선을 거쳐 생명력 넘치는 예술로 재탄생하고 있었다.
작가는 화면에 그리고, 지우고, 긁어내고, 붙이는 과정을 반복하며 시간의 켜가 쌓인 ‘벽면’을 만든다. 이 벽면 위에는 숫자, 기호, 낙서, 그리고 지난 시대의 파편들이 콜라주 되어 흐릿하게 명멸한다. 이는 사회적 아우성과 개인적 고독이 혼재된 현대 사회의 자화상이자, 우리가 잊고 지낸 기억의 고고학적 발굴 현장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 제목인 ‘소리 그리고 침묵’은 중의적이다. 현대인들은 소음의 아우성 속에서 지쳐가지만, 노재순은 그 소란스러운 낙서들(Sound) 한가운데에 굳게 다문 혹은 뜨겁게 열린 입술(Silence)을 배치함으로써 정적의 힘을 극대화한다. 거친 배경이 현실의 고단함이라면, 그 안에서 피어난 원색의 입술은 우리가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될 긍정과 희망의 불꽃이다.
작가는 말한다. "우리가 영위하는 세상에는 수많은 소리가 존재한다. 그 소리에 귀 기울여 보면 그 속에 긍정과 희망의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다." 작가가 묘사한 입술은 단순한 신체의 일부가 아니라, 타인과 세상을 향해 열린 '마음의 창'이자, 힘겨운 삶을 견뎌내게 하는 '위로의 성채'인 셈이다.
작업실을 나서는 길, 작가의 뒷모습에서 소년의 순수함과 거장의 집념을 동시에 보았다. 오는 3월 네오아트센터에서 열릴 기획전은, 관람객들에게 각자의 가슴속에 숨겨둔 ‘빛바랜 종이 한 장’을 꺼내 보게 하는 따뜻하고도 강렬한 성찰의 시간이 될 것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각자의 입술이 머금고 있는, 하지만 아직 차마 내뱉지 못한 저마다의 '희망'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 네오아트센터 박정식 대표
노재순, 입술로 쓴 인생의 의태어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다. 예부터 입술은 인간의 의사가 소통되는 통로이자, 마음의 문으로 여겨졌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인생의 힘든 고비마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결의를 다지고, 골이 잔뜩 난 어린아이의 삐죽 나온 입술에서 그 어떤 말보다 선명한 감정을 읽어내기도 한다. 이렇듯 입술은 인간이 가진 가장 정직하고도 민감한 ‘감정의 의태어’다.
2월 하순, 봄을 시샘하는 눈발이 들녘을 하얗게 덮던 날, 노재순 작가의 작업실을 찾았다. 화실 문을 열자마자 마주한 것은 캔버스를 가득 채운 거대한 선홍빛 입술들이었다. 무채색의 거친 배경을 뚫고 터져 나오는 그 강렬한 색채는, 차가운 눈길을 뚫고 온 방문객의 시각을 단숨에 압도했다.
노재순은 지난 10여 년간 ‘입술’이라는 단일 소재에 천착해온 우리 시대의 화가다. 21대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을 역임하며 한국 미술계의 행정적 기틀을 다졌던 그가, 작가로서 도달한 예술적 종착지는 역설적이게도 가장 본능적인 신체 부위인 ‘입술’이었다.
작업실 한편에 놓인 빛바랜 흑백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국민학교 시절, 소년 조선일보 주관 사생대회에서 입상하며 수줍게 웃고 있는 소년 노재순의 모습이다. 그 소년의 진지한 눈빛은 60년의 세월을 건너 지금 거대한 캔버스 앞에 선 거장의 화력으로 치환되었다. 1990년대 후반 ‘Relation(관계)’ 시리즈에서 보여준 인간 존재에 대한 원초적 고뇌는, 이제 입술이라는 고도로 응축된 상징을 통해 세상을 향한 명징한 메시지로 거듭났다.
나는 그의 작품 배경에서 묘한 향수를 느꼈다. 그것은 마치 70년대 연애편지 속에 몰래 찍어 보냈던, 지금은 빛바랜 키스마크가 담긴 종이 한 장을 우연히 발견한 듯한 느낌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잊힌 첫사랑의 흔적일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삶의 치열한 고비마다 삼켰던 무언의 외침일 그 자국들이 작가의 시선을 거쳐 생명력 넘치는 예술로 재탄생하고 있었다.
작가는 화면에 그리고, 지우고, 긁어내고, 붙이는 과정을 반복하며 시간의 켜가 쌓인 ‘벽면’을 만든다. 이 벽면 위에는 숫자, 기호, 낙서, 그리고 지난 시대의 파편들이 콜라주 되어 흐릿하게 명멸한다. 이는 사회적 아우성과 개인적 고독이 혼재된 현대 사회의 자화상이자, 우리가 잊고 지낸 기억의 고고학적 발굴 현장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 제목인 ‘소리 그리고 침묵’은 중의적이다. 현대인들은 소음의 아우성 속에서 지쳐가지만, 노재순은 그 소란스러운 낙서들(Sound) 한가운데에 굳게 다문 혹은 뜨겁게 열린 입술(Silence)을 배치함으로써 정적의 힘을 극대화한다. 거친 배경이 현실의 고단함이라면, 그 안에서 피어난 원색의 입술은 우리가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될 긍정과 희망의 불꽃이다.
작가는 말한다. "우리가 영위하는 세상에는 수많은 소리가 존재한다. 그 소리에 귀 기울여 보면 그 속에 긍정과 희망의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다." 작가가 묘사한 입술은 단순한 신체의 일부가 아니라, 타인과 세상을 향해 열린 '마음의 창'이자, 힘겨운 삶을 견뎌내게 하는 '위로의 성채'인 셈이다.
작업실을 나서는 길, 작가의 뒷모습에서 소년의 순수함과 거장의 집념을 동시에 보았다. 오는 3월 네오아트센터에서 열릴 기획전은, 관람객들에게 각자의 가슴속에 숨겨둔 ‘빛바랜 종이 한 장’을 꺼내 보게 하는 따뜻하고도 강렬한 성찰의 시간이 될 것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각자의 입술이 머금고 있는, 하지만 아직 차마 내뱉지 못한 저마다의 '희망'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 네오아트센터 박정식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