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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훈 조각가/ '아리랑을 다시 쓰다' 상세 내용

정창훈 조각가/ '아리랑을 다시 쓰다'
조각가 정창훈이 말하는 비움은 단순한 부재나 무(無)가 아니다. 그것은 “형체는 남아 있지만 존재의 실재가 비워진 상태”이다.

지난해 오월, 김지현 교수 초대전이 열리고 있던 마산 현대미술관을 방문했다. 전시 오프닝 행사와 미술관에 마련된 조각가 정창훈 교수의 작업실과 작품들을 둘러보기 위해서였다. 폐교를 문화공간으로 재탄생시킨 미술관은 넓은 운동장에 다양한 조각 작품들이 펼쳐져 있었고, 작업장에는 거대한 돌과 나무, 그리고 미완의 조형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조각가의 작업장은 흔히 하나의 공장에 비유된다. 수많은 공구와 기계, 돌가루와 나뭇조각들 속에서 창작은 육체노동에 가까운 과정을 거친다. 지난해 방문했을 때에도 정창훈 교수는 나무를 이용한 작품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번 네오아트센터 초대전은 단순한 작품 전시가 아니다. 지난 40여 년간 돌과 청동, 나무와 유리, 플라스틱 등 다양한 재료와 씨름해 온 한 조각가의 응집된 시간이 전시로 기획되고 있다. 총 38점의 작품은 그의 치열한 구도적 여정과 예술성 그리고 우리 민족의 영혼인 ‘아리랑’을 현대적 조형 언어로 새롭게 해석한 결과물들이 전시될 예정이다.​

이번 전시의 핵심에는 작가가 오랫동안 탐구해 온 ‘채움과 비움’의 변증법이 자리하고 있다. 정창훈이 말하는 비움은 단순한 부재나 무(無)가 아니다. 그것은 “형체는 남아 있지만 존재의 실재가 비워진 상태”이다. 수 톤에 이르는 대리석과 규화목을 정과 망치로 깎아내는 지난한 노동 속에서 그는 물질을 다듬는 동시에 자신의 내면 또한 비워냈다. 돌의 중심이 텅 비게 된 자리, 바로 그 공간이 그가 말하는 ‘숨결의길’이다.

이 비움은 다시 채움을 위한 그릇이 된다. 작가는 비워진 틈새에 우리 민족의 정서와 영혼인 ‘아리랑’을 담아낸다. 석조 연작이 보여주는 고요한 침묵과 평면 작품들이 펼쳐내는 찬란한 빛의 선율은 관람자에게 상처를 위로하고 삶을 회복시키는 치유의 에너지를 전하고 있다. 텅 빈 공간은 결핍의 장소가 아니라 모든 것을 품어내는 가능성의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번 초대전 출품작은 이러한 조형 철학을 입체와 평면의 언어로 치밀하게 구현한다. 석조 12점과 목조 6점의 입체 작품은 육중한 물성 속에서 비움의 의미를 드러낸다. 반면 스테인드글라스와 한지, 아크릴로 구성된 20점의 평면 작품은 빛과 색채를 통해 비움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시각화하고 있다. 오색의 빛은 색동저고리의 파편처럼 공간을 유영하고, 한지 위에 흩뿌려진 ‘별꽃’들은 유년의 기억과 순수한 생명성을 환기한다. 가장 무거운 물질과 가장 가벼운 빛이 서로 호응하며 하나의 거대한 조형성을 완성하는 것이다.

작가가 이번 초대전에서 가장 내밀한 주제로 ‘비움’을 전면에 내세운 것은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물질의 무게를 덜어낼수록 정신은 더욱 깊어지고, 형상을 비워낼수록 인간과 삶에 대한 사랑은 더욱 응축해지기 때문이다.

정창훈 예술의 깊이는 그의 작업 이력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그는 충북대학교의 ‘황소상’을 비롯해 여러 지역에 공공 조형물을 남긴 작가이자, 한국 근대 조각의 선구자인 김복진의 예술적 유산을 복원한 작가로 유명하다. 흐릿한 사진 한 장만 남아 있던 ‘소년상’, ‘백화 여인상’, ‘불상’ 등을 3D 입체 기법과 당시 고증으로 복원하여 한국 조각사의 단절된 뿌리를 다시 이어 놓았다. 더 나아가 잊혀졌던 김복진 선생의 생가와 묘소를 직접 찾아내 그 역사적 가치를 현실 세계로 이끌기도 하였다.

네오아트센터 앞 수십 년 된 소나무와 대형 조경석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지난해 작가에게 기증받은 자연물은 기존 설치되어 있던 황학삼 작가의 조형 작품과 어우러져 네오아트센터의 새로운 상징이 되었다. 오랜 세월 바람과 비를 견디며 묵묵히 제 자리를 지켜온 소나무처럼 조각가 정창훈의 예술 역시 깊은 사유와 인내 속에서 완성되고 있다.

이번 초대전은 우리에게 묻는다. 무엇을 더 채울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비워내야 하는가를. 무거운 현실과 오래된 집착을 잠시 내려놓고 비움의 자리에서 우리는 잃어버렸던 삶의 순수한 희망과 다시 채워야 할 무언가를 발견하길 희망해 본다. / 네오아트센터 박정식 대표